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글을 쓰면 쓸수록 자아가 얇아지는 느낌

by 리안애미 2026. 2. 24.

내 생각을 정리하고, 나만의 언어로 세상을 설명하다 보면 점점 분명한 사람이 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설명을 시작할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아가 얇아질수록 세상은 넓어졌습니다. 예전에는 타인의 의견을 들으면 쉽게 방어적으로 반응했습니다. 그것은 제 생각이 틀렸다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면 쓸수록 자아가 얇아지는 느낌

 

단단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투명해졌습니다

 

처음에는 글을 쓰면 자아가 더 단단해질 줄 알았습니다. 내 생각을 정리하고, 나만의 언어로 세상을 설명하다 보면 점점 분명한 사람이 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예상과는 다른 감각을 경험했습니다. 생각을 문장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이게 정말 내 생각이 맞는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하게 되었습니다. 한 문장을 쓰고 나면 스스로 반박했고, 한 단락을 완성하면 다른 관점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글을 쓰기 전에는 분명하다고 믿었던 감정들이 막상 써보면 모호해졌습니다. 분노라고 생각했던 감정은 서운함에 가까웠고, 확신이라고 믿었던 태도는 사실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문장은 감정을 포장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정확히 쓰려다 보니 과장이 벗겨졌고, 솔직하게 쓰려다 보니 자존심이 깎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자아는 두꺼워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러 겹의 포장이 벗겨지며 얇아졌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단정하던 태도는 줄어들었고, 대신 ‘그럴 수도 있다’는 여백이 생겼습니다. 글쓰기는 나를 주장하는 행위인 동시에 나를 의심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자아는 견고한 성벽이 아니라, 빛이 통과하는 얇은 막처럼 변해갔습니다. 그것이 요즘 제가 느끼는 변화입니다.

 

 

나를 설명하려다 나를 해체했습니다

글을 쓰는 이유 중 하나는 나를 설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나는 이런 선택을 했고, 이런 생각을 하며 살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설명을 시작할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설명은 언제나 단순화를 요구했습니다. 복잡한 동기를 몇 줄로 줄이는 순간, 그 안에 있던 수많은 맥락이 사라졌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결정을 내린 이유를 쓰다 보면, 겉으로는 가치관 때문이라고 적게 됩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파고들면 그 결정 안에는 인정받고 싶은 마음, 실패를 피하고 싶은 마음, 남들보다 앞서고 싶은 마음이 섞여 있었습니다. 글은 그것을 가려두지 못하게 했습니다. 결국 저는 스스로를 미화하지 못한 채, 생각보다 평범하고 계산적인 존재임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은 자존심을 깎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해방감이 있었습니다. 나를 영웅으로 설정하지 않아도 되었고, 항상 옳은 사람으로 남으려 애쓰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글을 쓸수록 저는 단단한 캐릭터가 아니라, 계속 수정되는 초고에 가까운 존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아는 완성본이 아니라, 계속 퇴고되는 문장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점점 얇아졌습니다. 하지만 그 얇음은 부서지기 쉬움이 아니라, 수정 가능성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얇아진 자아 덕분에 더 넓어졌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아가 얇아질수록 세상은 넓어졌습니다. 예전에는 타인의 의견을 들으면 쉽게 방어적으로 반응했습니다. 그것은 제 생각이 틀렸다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글을 통해 스스로를 수없이 반박해본 뒤에는, 타인의 말이 곧 공격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이미 제 안에서 여러 번 부서져본 생각이었기 때문입니다.

얇아진 자아는 쉽게 찢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람에 잘 휘어졌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못 박지 않으니, 다른 가능성이 들어올 자리가 생겼습니다. 예전 같으면 받아들이지 않았을 관점도, 이제는 잠시 품어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확신은 줄었지만 이해는 늘었습니다. 주장하는 목소리는 낮아졌지만, 듣는 태도는 깊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얇아짐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글을 쓰며 자아가 닳아간다고 느꼈지만, 실은 불필요한 두께가 줄어든 것일지도 모릅니다. 과장과 허세, 방어와 체면이 걷히고 남은 얇은 층이 지금의 저입니다. 아직도 쓰는 중이며, 여전히 수정 중입니다. 어쩌면 글쓰기는 나를 두껍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는 과정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덜어냄 끝에 남는 얇은 자아가, 지금의 저를 가장 솔직하게 설명하는 모습입니다.